마크 웹 감독의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공식을 거부하며, 한 남자의 시선을 따라 사랑의 시작과 끝, 기대와 실망, 이상과 현실을 교차 편집으로 담아낸 감성적인 드라마다. 톰과 썸머의 이야기는 단순한 이별담이 아닌, 우리가 사랑을 통해 얼마나 자신을 비추고, 자란다는지를 보여주는 감정의 성장 서사다. 비틀어진 로맨스 속에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영화.
“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 시작부터 선언된 관계의 본질
‘500일의 썸머’는 영화 시작부터 관객에게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누구보다 사랑에 집착하는 인물 톰의 이야기다. 그는 감성적이고 낭만을 믿는 청년으로, 우연히 만난 썸머에게 빠져든다. 썸머는 톰이 일하는 카드 회사에 새로 입사한 여성으로, 자유롭고 쿨하며 사랑에 대해 비관적인 시선을 가진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의 온도차는 관계의 시작부터 균열을 예고한다. 톰은 썸머와의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녀를 ‘운명’이라 믿는다. 반면 썸머는 그런 틀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난 사랑을 믿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톰은 그마저도 매력이라 여긴다. 영화는 이들의 500일을 선형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톰의 기억을 따라 시간 순서를 교차하며 편집함으로써, 관계의 희열과 슬픔을 보다 입체적으로 구성한다. 서론에서 ‘500일의 썸머’는 단지 두 사람의 로맨스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투영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사랑을 한다’는 말보다 ‘사랑을 기대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억은 아름답게 왜곡되고, 진실은 결국 모습을 드러낸다
톰은 썸머와의 관계를 회상하면서, 좋은 순간들만을 반복적으로 떠올린다. 처음 만났던 날, 음악을 나누던 순간, 이케아 매장에서 함께 노는 장면 등은 톰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와 동시에, 같은 장면 안에 숨어 있는 썸머의 미묘한 거리감과 시선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톰은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본다. 이 시점의 차이는 곧 관계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입장 차를 상징한다. 영화는 이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기대 vs 현실’ 장면을 제시한다. 톰이 썸머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기대한 장면과, 실제 그가 겪은 현실의 장면이 동시에 분할 화면으로 진행된다. 기대 속 썸머는 여전히 다정하고, 톰을 환영하지만, 현실의 썸머는 이미 마음이 멀어진 상태다. 이 연출은 톰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관객에게 ‘우리는 얼마나 관계를 왜곡된 시선으로 기억하는가’를 묻는다. 썸머는 톰을 이용하거나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관되게 ‘연애는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왔고, 톰은 자신의 욕망을 그녀에게 투영했을 뿐이다. 영화는 톰을 미워하지도, 썸머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관계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오해와 상처를 관조적으로 보여준다. 본론에서 ‘500일의 썸머’는 사랑이란 결국 각자의 방식대로 해석되는 이야기이며, 그것이 틀리다기보다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솔직하게 담아낸다. 그 사랑이 끝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때 보지 못했던 진실’을 떠올리게 된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시작 – 썸머 이후, 톰은 ‘가을’을 만난다
‘500일의 썸머’는 이별로 끝나지만, 동시에 성장으로 이어진다. 톰은 처음엔 무너지고 방황하지만, 점차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썸머가 없어진 자리에 절망하는 대신,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꿈과 진짜 자아를 되짚는다. 건축가의 꿈을 다시 꺼내고,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는 새로운 사람 ‘오텀(가을)’을 만난다. 이 이름은 썸머(여름)와 대비되며, 상징적으로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영화가 전하려는 궁극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랑은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보다, 그 관계를 통해 우리가 누구로 성장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 톰은 썸머를 통해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를 배웠고, 사랑은 한 사람의 마음만으로 지속될 수 없음을 체감했다. 하지만 그 경험은 톰에게 좌절만을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사랑을 준비할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을 선물했다. ‘500일의 썸머’는 그저 연애담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고, 때로는 실패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누군가를 통해 기대하고, 좌절하고, 끝내 다시 시작하게 되는 그 모든 과정은 삶을 더욱 진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그 과정을 정직하게 마주한 드문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톰이 웃으며 “오텀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낭만주의자였던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말없이 증명한다.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