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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 시선과 침묵으로 완성된 금지된 사랑의 초상화

by overinfo 2025. 5. 24.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은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화가 마리안과 귀족 여성 엘로이즈 사이에 피어난 사랑을 섬세하고 절제된 미장센으로 그려낸 영화다. 말보다 눈빛, 사건보다 정서로 감정을 표현하는 이 작품은, 여성의 욕망과 자율성, 그리고 기억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진다. 모든 장면이 회화처럼 아름답고, 동시에 아프도록 진실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시작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한 폭의 그림처럼 시작된다. 프랑스 해안의 외딴 섬, 회색빛 바다와 절벽, 소리를 삼켜버릴 듯한 고요 속에 한 여성이 도착한다. 그녀는 화가 마리안. 그녀가 그리는 대상은 엘로이즈라는 귀족 여성이다. 하지만 이 초상화는 단순한 인물 묘사가 아니다. 엘로이즈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고, 자신이 그림 속 피사체가 되는 것도 거부한다. 마리안은 엘로이즈를 몰래 관찰해 기억으로 초상을 완성해야 한다. 이 설정은 영화의 서사적 긴장을 만드는 동시에, ‘관찰’이라는 행위 자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마리안이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단지 예술적 분석이 아니라, 점점 깊어지는 감정이 담긴다. 마치 매 장면이 회화처럼 구성된 이 영화는, 미세한 표정 변화, 숨결, 시선의 움직임으로 감정의 진폭을 조율해 나간다. 서사는 느리지만 밀도 높고, 말보다 눈빛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서론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단순한 동성애 서사나 시대극을 넘어, ‘누가 누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시각적이고 감정적인 탐구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곧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다.

 

시선의 역전 – 그려지는 대상에서 응시하는 주체로

영화의 중심은 ‘시선’의 관계다. 전통적인 예술사에서 여성은 늘 ‘그려지는 존재’였고, 그 시선은 남성 화가의 것이었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이 권력이 뒤집힌다. 화가 마리안과 대상 엘로이즈 모두 여성이며, 그 시선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다. 마리안은 엘로이즈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지만, 동시에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의 손, 표정, 숨결을 관찰하며 그려낸다. 이는 단순히 인물 간의 감정적 교류를 넘어, 여성 간의 연대와 자율적 욕망의 선언으로 기능한다. 영화 중반, 엘로이즈는 말한다. “당신은 나를 그리는 게 아니라, 우리를 그리고 있어요.” 이 대사는 이 작품의 정체성을 명확히 한다. 이 사랑은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며, 그려지는 대상도 능동적인 주체로 존재한다. 두 인물은 남성 중심 사회가 허용하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가고, 욕망하고, 사랑한다. 영화는 성적 표현 대신, 촛불과 그림자, 옷깃과 손끝, 불타는 책장의 은유로 감정을 묘사한다. 이런 연출은 억눌린 시대의 감정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 사랑의 무게와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특히 엘로이즈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자신을 마주 보며 불꽃처럼 서 있는 장면은, 이 영화의 상징적 정점이다. 본론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단지 사랑의 감정만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시선을 되찾고, 예술을 통해 자신을 기록하는지를 섬세하고 치밀하게 설계한다.

 

기억의 초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 사랑이 남긴 불씨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별로 끝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관계의 종료가 아니라, 기억과 예술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진실에 대한 선언이다. 두 사람은 시대와 조건 앞에서 끝내 함께할 수 없다. 엘로이즈는 결혼해야 하고, 마리안은 그림을 떠난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각자의 삶에 깊이 새겨진다. 마리안은 그림 속에 엘로이즈를 남기고, 엘로이즈는 책 속 페이지에 마리안의 흔적을 숨긴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의 흐름 뒤,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눈물을 흘리는 엘로이즈의 얼굴을 비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순간을, 그 감정을, 그 여름을 간직하고 있다. 이 장면은 그 어떤 재회보다 깊은 울림을 남긴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아도, 함께하지 않아도, 완성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말한다. 우리가 사랑했던 이의 얼굴, 목소리, 손끝, 숨결은 잊힌다 해도, 그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삶에 남아 불씨가 된다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래서 연애 영화이자, 예술 영화이며, 동시에 여성과 기억에 대한 정치적 선언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억이 지금 당신을 어떻게 살게 만드는가? 사랑은 끝났지만, 그림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계속해서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