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도덕, 복수, 운명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차가운 시선과 기이한 리듬으로 풀어낸 심리 스릴러이다. 외과의사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통제 불가능한 공포가 서서히 침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고전 비극의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이 영화는 정제된 연출과 불편한 대사를 통해 윤리의 경계와 인간의 무력함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신의 분노는 누구를 향하는가: 복수는 언제나 조용히 시작된다
‘킬링 디어’는 첫 장면부터 관객에게 불쾌한 긴장감을 심는다. 심장 수술 장면의 클로즈업과 함께 들려오는 장중한 오페라 음악은, 이 영화가 다룰 주제가 단순한 공포가 아님을 예고한다. 주인공 스티븐(콜린 파렐)은 외과의사이며, 안정된 직장과 가족, 사회적 지위를 모두 갖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비밀스럽게 만나는 소년 마틴(배리 케오간)의 존재가 점점 의심스럽게 다가오면서, 일상의 틀은 서서히 무너져간다. 마틴은 과거 스티븐이 수술 도중 실수로 죽게 만든 환자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미묘한 존경과 애증이 교차하는 듯 보이던 마틴의 태도는 곧 스티븐 가족 전체를 위협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그의 말대로, 스티븐의 두 자녀는 갑자기 하반신 마비 증세를 보이고,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마틴은 차분한 어조로 말한다.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당신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해요.” 이 잔혹하고 비논리적인 명제는 그리스 비극의 ‘신의 복수’ 같은 구조를 떠올리게 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대가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서론에서 ‘킬링 디어’는 도덕적 책임과 무형의 죄, 그리고 그에 대한 응징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찾아올 수 있는지를 서늘하게 설정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균형과 질서가 무너진 세계, 비극은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온다
‘킬링 디어’는 스릴러지만, 관객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기보다는 점점 조여 오는 긴장감으로 숨을 막히게 만든다. 이 영화의 공포는 괴물도, 폭력도 아닌 ‘논리의 부재’에서 온다. 마틴의 행위는 초자연적이지만, 영화는 이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스티븐과 그의 가족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집중한다. 스티븐은 처음엔 의료적 문제로 의심하고, 후엔 마틴을 경찰에 넘기려 하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들은 점차 무력감에 빠지고, 그들 각자는 생존을 위해 서로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영화 중반부터는 가족의 도덕적 균열이 명확해진다. 아내 애나는 마틴을 설득하거나 유혹하려 하고, 딸 킴은 마틴에게 호감을 느끼며 그를 받아들이려 하며, 아들 밥은 고통 속에서도 ‘내가 죽을게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들은 모두 인간의 본능과 도덕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스티븐은 결국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지만, 그는 끝까지 결정을 미룬다. 그러나 영화는 명확히 말한다. 선택을 유예하는 것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아니며, 때로는 더 잔혹한 결과를 부른다. 스티븐은 결국 제비 뽑기를 통해 ‘공정한 죽음’을 연출하려 하고, 이 장면은 영화의 도덕적 한계점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진짜 공포는, 스티븐이 의도치 않게 저지른 실수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결과가, 더 이상 책임을 질 수 없는 방식으로 돌아오는 아이러니에 있다. 본론에서 ‘킬링 디어’는 윤리와 책임이라는 주제를 고전 비극처럼 압축적이고 잔혹하게 풀어내며, 우리가 믿는 도덕의 균형이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역설한다.
죽음은 정의가 아니다 – 냉혹한 질서 속, 인간의 얼굴을 묻다
‘킬링 디어’는 끝까지 관객에게 해답을 주지 않는다. 영화는 마틴이 왜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지, 그가 상징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신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으며, 혹은 스티븐이 만들어낸 죄책감의 화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존재가 스티븐에게 절대적인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이 윤리적 딜레마는, 고대 그리스 비극 ‘이피게네이아를 위한 제물’처럼, 제물 없이는 세계가 굴러가지 않는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영화는 이 끔찍한 논리를 한 치의 감정 없이 묘사한다. 캐릭터들의 대사는 평이하고 건조하며, 카메라는 항상 일정한 거리에서 인물을 관찰한다. 이 연출은 감정을 억제하는 대신,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도덕은 언제나 옳은가? 인간의 생명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결말에서 스티븐은 아들을 선택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 이후, 가족들이 식당에서 마틴과 다시 마주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지만, 모든 감정은 눈빛에 담긴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깊은 불편함과 동시에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킬링 디어’는 공포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상은 인간의 도덕성과 무력함, 그리고 선택이라는 행위의 본질을 가감 없이 드러낸 철학적 작품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물음은 계속된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선택은, 나를 인간답게 만들었을까? 그렇게 이 영화는 관객의 양심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민다. 아프고,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