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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홈 리뷰 – 괴물은 밖에 있는가, 아니면 내 안에 있는가

by overinfo 2025. 6. 22.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스위트홈’은 인간의 욕망이 괴물이 되는 세계를 배경으로, 생존과 공존,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장르물이다. 단순한 크리처 호러를 넘어 인간 내면의 어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욕망과 본능, 윤리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스위트홈 리뷰

 

욕망이 괴물이 된 세계, 생존 그 너머의 이야기

‘스위트홈’은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하여, 넷플릭스에서 2020년 공개된 한국형 크리처 드라마다. 전통적인 좀비물이나 괴수물과는 결을 달리하는 이 작품은, 단순한 바이러스나 감염이 아닌 ‘인간의 욕망이 현실로 발현되어 괴물이 된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제시한다. 이 설정은 단순한 시각적 공포를 넘어, 인간의 심리와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드라마는 자살을 결심한 고등학생 차현수(송강)가 부모를 잃고 '그린홈'이라는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자신과 같은 입주민들이 하나둘 괴물로 변해가는 기이한 사태와 마주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괴물이 단지 외부에서 공격해 오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설정이다. 감염의 원인은 바이러스가 아닌, 각자의 ‘욕망’이다.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 사랑받고 싶다는 절망, 건강을 되찾고 싶은 희망 등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 극단적 형태로 발현되며 괴물화를 유도한다. ‘스위트홈’은 이러한 설정을 통해, 재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섬세하게 탐구한다. 어떤 사람은 타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다. 아파트라는 폐쇄적 공간은 각 인물의 본성이 드러나기 가장 적절한 무대가 되며, 시청자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괴물과 괴물보다도 더 비정한 인간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서론에서는 ‘스위트홈’이 제시하는 세계관과 장르적 차별성,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본성이라는 중심 테마를 어떻게 시각적 상징과 심리적 서사로 풀어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드라마는 단지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포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스스로 묻게 하는 서사적 힘을 지닌 작품이다.

 

괴물과 인간, 그 모호한 경계선 위에서

‘스위트홈’의 가장 큰 특징은 괴물의 탄생 과정을 심리적 메커니즘과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괴물은 무작위로 발생하지 않는다. 각 캐릭터의 내면에 존재하던 욕망이나 결핍, 분노와 절망이 그들만의 ‘괴물’로 발현된다. 이로 인해 시청자는 괴물을 단순한 공포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왜 저런 괴물이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만들고, 때로는 그 괴물에게 감정이입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대표적인 예는 소방관 출신의 편도희(이시영)와 차현수의 관계이다. 도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인한 생존자이지만, 타인을 지키기 위한 결단을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차현수는 끊임없이 괴물화의 경계에 놓이며, 인간성과 괴물성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그는 결국 ‘완전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른다. 이 과정은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니라, 내면의 욕망과 도덕성 사이에서의 고뇌를 다룬 심리극이다. ‘스위트홈’이 다루는 괴물은 실체보다 상징에 가깝다. 식욕을 참지 못해 거대한 괴수로 변한 남성, 감정 억제가 실패해 기형적 신체를 지닌 괴물, 주변을 해치지 않으려 눈과 귀를 가린 괴물 등은 모두 인간의 감정과 심리가 시각적으로 투사된 결과물이다. 이 상징성은 각 괴물이 단지 공포의 대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만들며, 작품의 철학적 깊이를 더해준다. 또한 드라마는 집단 내의 심리 변화도 치밀하게 묘사한다. 제한된 공간에서의 갈등, 불신, 폭력은 감염보다 더 큰 공포를 만들어낸다. 누가 감염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은 모든 인간관계를 의심하게 만들고, 공동체는 점점 붕괴되어 간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인물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일부는 기득권을 쥐려다 파멸에 이른다. 이 모든 서사는 ‘인간은 괴물보다 나은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청자 스스로의 윤리관과 감정을 시험한다. 본론에서는 ‘스위트홈’이 괴물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 내면의 어둠과 갈등,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직조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단순히 누가 괴물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 드라마의 진짜 공포이자 철학이다.

 

괴물은 누구인가 – 나인가, 우리인가

‘스위트홈’의 마지막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차현수는 여전히 괴물화의 경계에 서 있고, 세상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결말이 아닌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고,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공동체가 그것을 함께 감당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드라마는 괴물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괴물이 된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더 중요하게 그려진다. 특히 유일하게 인간성과 괴물성을 모두 가진 차현수는,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통제하며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싸운다. 이는 어떤 초능력보다도 더 강력한 인간의 자제력과 책임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스위트홈’은 ‘우리’라는 개념을 깊이 탐구한다. 재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인은 공동체를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버틸 것인가. 이 선택의 기로에서 드러나는 각 인물의 반응은 우리가 실제 사회 속에서 마주하게 될 윤리적 선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드라마는 인간의 본성이란 외부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괴물의 씨앗일 수 있다는 냉철한 통찰을 던진다. 결국 ‘스위트홈’은 괴물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드라마’이며, ‘윤리 드라마’다. 우리가 평소 억눌러온 욕망, 외면했던 결핍, 용서받고 싶었던 죄책감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날 수 있음을 경고하고, 동시에 그것을 마주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도 인간 안에 있음을 역설한다. 괴물은 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우리를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닌 이해와 연대, 그리고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