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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리뷰 – 소녀의 시선으로 기억을 수놓는 성장과 상실의 서정시

by overinfo 2025. 5. 23.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199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중학생 은희의 시선을 통해 가족, 학교, 사회,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성장과 상실을 조용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사소한 감정의 떨림과 일상의 틈에서 피어나는 내면의 파장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한국 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여성 성장서사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기억과 고통, 그리고 위로의 기록으로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벌새 리뷰

 

작은 존재의 진동이 만들어낸 서사의 결

‘벌새’는 거창한 사건 없이도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영화는 중학생 은희(박지후)를 중심으로, 그녀가 살아가는 1994년의 일상과 그 속에서 겪는 감정의 미세한 변화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큰 지진처럼 자리한 ‘성수대교 붕괴’라는 사건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지만, 그조차도 이 영화에선 단지 외부의 물리적 충격이 아니라, 은희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붕괴와 맞물려 있다. 은희는 부모의 무관심, 형제와의 갈등, 친구와의 오해, 처음 겪는 연애 감정, 그리고 의지하던 인물의 상실을 차례로 겪으며 자신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영화는 은희의 시선과 감각을 따라가며, 그녀가 느끼는 고립감과 혼란, 작은 기쁨과 위로의 순간들을 자연광처럼 은은하게 비춘다. 특히 중요한 인물은 한문 교사 ‘영지’ 선생이다. 그는 은희가 처음으로 진심 어린 소통과 존중을 경험하게 해주는 어른이다. 이 관계는 영화 전체를 통해 한 줄기 빛처럼 기능하며, 은희가 삶의 상처를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된다. 서론에서 ‘벌새’는 우리가 지나쳤던 어린 시절의 감정, 무심코 흘려보냈던 상처의 진폭을 다시금 조명하며,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내면의 기록을 되짚는 진지하고 아름다운 시도로 시작된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 들여다보지 않았던 감정들

‘벌새’는 은희의 삶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는 늘 일정한 거리에서 그녀를 지켜본다. 이는 은희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되, 관객이 그녀의 내면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미학적 전략이다. 은희는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하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폭력적인 아버지, 무관심한 어머니, 권위적인 교사,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친구들 사이에서, 은희는 점점 더 외로워진다. 그러나 영화는 이 외로움을 눈물이나 절규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침묵, 응시, 몸짓, 그리고 공책 위의 짧은 문장들로 전달한다. ‘벌새’의 대사들은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큰 울림이 있다. 예컨대, 영지 선생이 은희에게 해주는 말—“너는 존재만으로도 의미가 있어”—는 영화 전체의 정조를 집약한다. 이 말은 어떤 사건보다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은희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슬퍼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진심으로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어린 존재가 처음으로 감정의 무게를 인식하고, 스스로 감당하려는 성장의 증거다. 본론에서 ‘벌새’는 한 개인의 미시적 성장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며 잊었던 감정들—작고 복잡하고,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존재했던 감정들—을 되살려낸다. 이 영화는 ‘감정의 기록’이자, 그 기록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성장은 상실의 다른 이름, 그리고 기억은 위로의 시작

‘벌새’는 성장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은희는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사람을 잃고, 아무도 그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조용히 아파한다. 하지만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순간, 그녀는 이미 성장하고 있다. 영화는 결코 위로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상실이 남긴 여백을 인정하고, 그 여백 속에서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들여다본다. 이는 ‘벌새’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세상은 여전히 불친절하고, 은희의 삶에도 완전한 해결이나 반전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깊다. 김보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성장’이라는 단어를 낭만적 환상이 아니라, 감정의 축적과 감내의 과정으로 재정의한다. ‘벌새’는 결국 말한다. 상실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를 지탱하는 아주 작은 힘이 되어 언젠가 날아오를 수 있게 해 준다고. 이 영화는 그렇게, 나지막하지만 깊은 목소리로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말을 건넨다. "괜찮아.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 모두 의미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