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Babylon)’은 192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전환기, 그 격변의 시대 속에서 꿈꾸고 무너진 예술가들의 이야기입니다.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디에고 칼바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영화 산업의 부흥과 타락, 예술과 자본의 충돌, 그리고 개인의 열망과 시대의 파도 사이에서 일어나는 찬란하고도 비극적인 순간들을 담아낸 감각적 서사입니다.
열정과 탐욕, 영화의 시작은 혼돈이었다
‘바빌론’은 영화가 아직 산업으로서 자리를 잡기 전, 꿈과 야망, 광기와 퇴폐가 뒤섞인 할리우드 초기 시대를 무대로 펼쳐집니다.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의 정점에 있던 영화 산업은 기술의 변화와 함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고, 이 변화는 곧 예술가들의 명멸, 그리고 새로운 스타의 탄생과 몰락이라는 극단적인 변화를 수반합니다. 이 영화는 세 명의 중심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는 전성기의 무성영화배우로, 점점 유성영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져 가는 인물입니다.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는 거리에서 상업영화의 스타로 급부상하는 꿈 많은 여성이며,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는 영화 산업의 중심에서 일하고자 하는 멕시코계 이민자입니다. 이 셋은 각각 영화 산업의 다른 층위에서 시대의 빛과 어둠을 경험합니다. 초반의 파티 신은 이 영화의 정서를 요약합니다. 광기와 쾌락, 도취와 혼돈으로 가득한 이 장면은 영화가 보여줄 ‘과도기’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그것은 단지 시대의 타락이 아니라, 예술과 권력, 꿈과 파멸이 섞인 질서 없는 창조의 순간이자, 모든 것이 가능했던 시간입니다. 감독은 이 장면들을 통해 관객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상업적 성공을 위한 수단인가, 인간 감정의 가장 고결한 표현인가.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누가 살아남고, 누가 지워지는가. 이러한 질문은 영화 내내 인물들의 선택과 실패, 그리고 잊힘을 통해 반복적으로 되풀이됩니다. 특히 이 영화는 꿈을 좇았던 이들이 그 꿈에 먹히는 과정을 세밀하게 조명합니다. 잭은 자신의 존재감이 점점 퇴색함을 감지하고, 넬리는 스타로 부상하지만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으며 무너지고, 매니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결국 타협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들의 서사는 할리우드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을 키워내고, 소비하며, 결국 폐기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결국 ‘바빌론’은 영화 산업의 역사라기보다, 예술을 향한 열망이 자본의 회오리 속에서 어떻게 뒤틀리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혼돈은 단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콘텐츠 산업 속에서도 반복되는 구조이기에 더욱 시사적입니다.
형식의 해체와 감각의 폭발, 바빌론의 영화적 언어
‘바빌론’은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자극을 통해 관객의 감각을 뒤흔드는 영화입니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기존의 고전적 서사 구조를 파괴하고, 일련의 감정과 충격, 이미지의 연속으로 극을 구성합니다. 특히 롱테이크, 매드카메라 워크, 급격한 편집 전환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시대의 속도’와 ‘혼란’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넬리가 처음 무성영화 촬영 현장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단 한 테이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십 명의 배우와 스태프, 폭발하는 소품과 날씨 변화까지 포함되어, 초기 영화 촬영의 광기와 창조의 혼돈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관객은 마치 100년 전 영화 현장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영화의 세계에 몰입하게 됩니다. 음악은 저스틴 허위츠가 맡아, 기존의 재즈 사운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곡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음악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서사의 리듬을 이끄는 주체로 작용하며, 특히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마다 카메라와 함께 관객의 심장을 뛰게 만듭니다. 초기 재즈 클럽의 열기, 할리우드 파티의 광란, 그리고 후반부의 허무한 고요까지—음악은 이 영화의 심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감독은 장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스릴러, 블랙 코미디, 드라마, 환상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뒤섞이며, 영화는 하나의 형식에 안주하지 않고 불안정한 정서를 유지합니다. 이는 극의 중심이 되는 ‘할리우드 시스템’ 자체가 혼종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구조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또한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연출도 인상적입니다. 코끼리의 등장, 벌거벗은 무명의 군중, 거대한 카메라 장비와 마이크, 폐허가 된 세트장, 노을에 물든 사막—이 모든 것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권력, 파멸, 예술, 기억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현실적인 장면과 판타지적인 장면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관객의 해석을 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연기 역시 이 영화의 감정선을 완성합니다. 마고 로비는 감정의 격렬한 파동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넬리라는 캐릭터의 무모함과 애처로움을 설득력 있게 표현합니다. 브래드 피트는 중년의 허무와 과거의 영광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연기를 선보이며, 디에고 칼바는 성장과 절망,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청년의 초상을 진정성 있게 그려냅니다. 이처럼 ‘바빌론’은 형식과 감각, 상징과 현실이 겹쳐진 콜라주와 같은 영화이며, 그 불균형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기억과 망각, 그리고 영화라는 환영의 구조
‘바빌론’의 마지막 20분은 영화 전체의 정체성을 압축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니가 극장에 앉아 영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몽타주를 보는 장면—그 안에는 영화가 만들어온 수많은 이미지의 흔적들이 흘러가고, 그의 얼굴엔 혼란과 감정, 환멸과 경외가 동시에 떠오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인물의 감정이 아니라, 영화라는 예술이 지닌 본질에 대한 감독의 응시입니다. 영화는 기술과 형식이 변해도, 인간의 감정과 기억은 여전히 ‘이미지’를 통해 보존된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무성영화, 유성영화, 디지털 영상, CGI까지—어떤 형식이든 결국 그것은 사람의 삶과 감정을 담는 ‘그릇’이며, 그 그릇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절망하고, 기억하게 됩니다. ‘바빌론’은 영화의 기원을 조명하면서도, 그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영화가 사람을 살릴 수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개인이 착취되고 소모되어 왔다는 사실은 냉정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꿈이고, 삶이고, 신앙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가장 감동적인 이유는, 결국 이 세계를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스타의 마지막, 카메라 뒤에서 죽는 조연, 조명기사의 비명 속에도, 여전히 영화는 돌아갑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프레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합니다. ‘바빌론’은 그 모든 사랑과 슬픔, 광기와 경외를 있는 그대로 품은 영화입니다. 그것은 영화에 대한 러브레터이자, 영화가 가진 잔혹함과 찬란함을 동시에 껴안는 고백입니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이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그래서 ‘바빌론’은 논쟁적이고 과잉된 영화이지만, 동시에 가장 솔직한 영화입니다. 꿈이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져도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 영화는, 오랫동안 관객의 내면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바빌론’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모두, 찰나의 빛 속에서 무너지고, 그 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