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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리뷰 – 생존의 바다에서 피어난 여성들의 욕망과 연대

by overinfo 2025. 6. 9.

‘밀수’는 1970년대 한국의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물속에서 삶을 건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범죄 액션 드라마다. 바다라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밀수와 생존의 경계를 넘나들며, 여성 캐릭터들이 중심이 되어 펼치는 갈등과 우정, 배신과 연대의 서사는 신선하고 강렬하다. 탄탄한 연기와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장르적 재미를 넘어선 진한 인간극을 담고 있다.

밀수 리뷰

 

숨겨진 역사 속 여성들 – 바다에서 건져 올린 또 다른 삶

‘밀수’는 1970년대 후반 한국을 배경으로, 우리가 익히 알지 못했던 여성들의 생존 방식을 조명한다. 영화는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는 드러나지 않는, 해안 도시 속 ‘밀수’라는 경제 활동에 뛰어들어야 했던 여성 다이버들의 삶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일반적인 범죄 액션 장르에서는 보기 힘든 여성 중심 서사이자, ‘하류 인생’으로 치부됐던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진지한 시도이기도 하다. 주인공 춘자(김혜수 분)와 진숙(염정아 분)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바다를 누빈 친구 사이지만,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며 다른 삶을 살아간다. 춘자는 지역 유지의 하수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굴욕을 감수하고, 진숙은 위험한 밀수 사업에 뛰어들어 빠르게 성장한다. 그러나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과거의 정과 현재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여성 캐릭터’가 단순히 피해자나 주변인이 아닌, 이야기의 중심축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남성 중심의 범죄 세계에 단순히 소외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으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주체로 그려진다. 특히 바다라는 공간은 그들의 삶과 생존의 무대이며, 동시에 자유와 억압이 교차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기능한다. 감독 류승완은 이 작품에서 특유의 리듬감 있는 연출력을 발휘한다. 시퀀스마다 속도감 있는 전개, 스타일리시한 편집, 그리고 70년대 특유의 색감을 살린 미장센이 영화를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모든 외형적 장치들이 여성 캐릭터들의 감정과 서사를 더욱 생생하게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론에서는 ‘밀수’가 단순한 범죄 영화가 아닌, 과거의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삶을 지키고, 관계를 형성하고, 현실과 타협했는지를 되돌아보는 의미 있는 서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현실의 벽 앞에서의 절박함과 고통, 그리고 그 안에서도 피어난 연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강한 울림을 준다. 결국 영화는 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라고.

 

욕망과 배신, 그리고 연대 – 여성 누아르의 새로운 전형

본론에서 ‘밀수’는 본격적으로 밀수 사업의 실체와 그 안에서의 인간 군상을 펼쳐 보인다. 춘자와 진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바다와 관계를 맺고, 각자의 생존법을 터득해 왔다. 그러나 밀수 세계는 단순한 도둑질이 아닌, 거대한 권력과 탐욕이 얽힌 복잡한 구조다. 그들은 남성 중심의 조직과 마주하고, 때로는 이용당하고, 때로는 반격한다. 춘자는 애초에 밀수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았지만, 가족과 생계, 과거의 관계에 이끌려 다시 그 세계로 끌려든다. 진숙은 성공을 위해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며 스스로를 희생시킨다. 두 인물의 갈등은 단순한 선악 대립이 아닌, 생존을 위한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둘 사이의 신뢰, 우정, 질투, 연민이 뒤섞이며 더욱 깊은 감정의 파도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밀수 작업 장면에서 높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긴박한 거래, 어둠 속에서의 무기 운반, 경찰의 급습 장면 등은 극도의 긴장감을 유도하며 장르 영화로서의 쾌감을 제공한다. 특히 여성들이 중심이 되는 액션 장면은 지금까지의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물었던 장면으로, 여성의 육체성과 결단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런 가운데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건 ‘연대’의 의미다. 춘자와 진숙은 결국 갈등 끝에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를 선택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여성 간의 복잡한 감정과 깊은 유대감을 그려내며, 여성 누아르라는 장르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한편, 조연 캐릭터들도 인상적이다. 지역의 경찰, 어시장 상인들, 밀수 브로커 등은 각자의 생존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간의 엇갈린 욕망은 영화의 현실감을 높인다. 이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바다’라는 공동의 무대 위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고 있으며, 그 모습은 영화 전체에 생생한 질감을 부여한다. ‘밀수’는 단지 긴장감 넘치는 범죄 드라마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사이의 관계, 특히 여성 사이의 갈등과 이해를 입체적으로 그리며, 장르적 쾌감 속에서도 깊은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감정의 결론은 언제나 삶에 대한 집념, 그리고 사람에 대한 희망이다.

 

바다는 기억하고 있다 – 생존 너머의 선택과 책임

영화의 후반부는 격동의 파도를 지나온 인물들이 각자의 선택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밀수의 세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이지만, 영화는 그것이 당시의 구조적 빈곤과 불평등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생존’이었음을 조용히 암시한다. 춘자와 진숙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대가를 치르지만, 영화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결말부에서 두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친구도, 경쟁자도 아니다. 그들은 함께 바다를 떠나는 마지막 여정에서, 침묵 속에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용서하며, 조용한 연대를 완성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클로징이 아니라, 영화 전반의 감정이 집약된 순간이다. 어떤 말보다 강한, 바다와 눈빛 사이의 교감이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감독은 결말에 이르러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진 이야기를 덮지 않고, 그 위에 조용히 희망을 얹는다. 법과 도덕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던 시대, 여성들은 자기 몫의 선택을 하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누군가에겐 상처가, 누군가에겐 생존의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밀수’는 그러한 선택이 절망이나 패배로만 귀결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각자의 대가를 치르면서도, 끝까지 누군가를 지키고, 나누고, 책임지려 한다. 그것이 바로 영화가 말하는 ‘진짜 연대’이며, 궁극적인 ‘존엄’이다. 결국 ‘밀수’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범죄 액션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고요한 휴먼 드라마다. 폭력과 거래, 배신과 음모를 넘어서, 영화는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그것은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 이해받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나아가 이해하려는 용기라고. ‘밀수’는 여성들이 중심이 된 장르 영화로서의 신선함은 물론, 한국 영화가 어디까지 감정과 스타일,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를 조화롭게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말한다. 바다는 다 잊지 않는다. 그리고 여성들의 이야기는,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