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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랜드 리뷰, 길 위의 삶이 말하는 자유와 상실

by overinfo 2025. 6. 7.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Nomadland)’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모든 것을 잃고 미국 서부를 떠도는 여성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여정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개인들의 삶과 정체성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영화는, 집이 아닌 ‘길 위의 삶’을 선택한 이들이 품고 있는 외로움과 해방의 이중적 감정을 조용히 응시합니다.

노매드랜드 리뷰

 

집을 잃은 것이 아니라, 선택한 길 위의 존재들

‘노매드랜드’는 단순한 로드 무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생존 조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는 이들에 대한 초상이며, 동시에 ‘정착하지 않음’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펀은 네바다 주 엠파이어라는 작은 산업도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로 도시 전체가 붕괴되고, 남편까지 세상을 떠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채, 집이 아닌 밴 안에서의 삶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도, 한 곳에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대신 그녀는 도로를 따라 미국 서부를 떠도는 노매드(Nomad)로서, 각지에서 단기 노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펀의 여정은 고통과 상실에서 출발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마존 창고, 캠핑장, 레스토랑 등 다양한 노동 현장을 전전하며 일하고, 그곳에서 노매드 커뮤니티의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인물들은 대부분 비전문 배우이자 실제 노매드로, 자신들의 삶을 연기하는 방식으로 영화에 등장합니다. 이는 영화의 진정성을 강화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이 단지 ‘사회적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 임을 인식하게 합니다. 펀의 삶은 불안정하고, 외롭고, 때론 위험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자신만의 루틴과 삶의 방식을 유지합니다. 차 안에서 밥을 짓고, 뒷좌석에 깔린 매트 위에서 잠을 자며, 자연과 조용히 교감하는 삶은 물질적인 안정은 없지만, 오히려 정서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노숙자(homeless)’와 ‘집이 없는 사람(houseless)’의 차이를 통해, 펀의 삶을 단지 상실이 아닌 선택으로 재해석합니다. 또한 영화는 자연 풍경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광활한 사막, 텅 빈 도로, 차가운 계절과 그 안에서 따뜻하게 빛나는 해—이 모든 것은 펀이 겪는 외로움과 회복의 리듬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이러한 풍경과 감정을 다큐멘터리적인 카메라워크로 따라가며, 감정의 과잉 없이도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결국 펀의 여정은 생존이자 회복이고, 이동이자 사유이며, 고립이자 연결의 이야기입니다. ‘노매드랜드’는 그러한 삶을 조용히, 그러나 절대적으로 응시합니다.

 

정적 속에 흐르는 강한 서사, 감정의 여백을 만드는 연출

‘노매드랜드’의 미학은 정적 속의 강한 서사입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인위적인 장면 구성이나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 일상의 단편을 따라가며 인물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대사가 많지 않고, 감정의 폭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강력한 감정적 밀도를 유지합니다. 펀과 주변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일견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상실감, 회한,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가 녹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중반부, 실제 노매드인 ‘밥 웰스’가 자신이 왜 도로 위의 삶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죽은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단지 한 사람의 이야기 같지만, 이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관계와 공동체, 기억의 연속성을 반추하게 만듭니다.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이 작품에서 삶과 연기의 경계를 허무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펀이라는 인물을 ‘창조’하지 않고, 그 인물의 삶 안으로 스며듭니다. 특히 그녀의 눈빛과 얼굴은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하며, 영화의 모든 장면이 ‘인물의 감정의 반사면’처럼 작동하게 만듭니다. 클로이 자오의 연출은 단지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객이 그 장면들 사이의 여백을 읽고, 스스로 감정을 구성하게 만듭니다. 예컨대 펀이 딸기를 수확하며 즐겁게 웃는 장면과, 다음 장면에서 홀로 텅 빈 밴 안에서 캔 음식을 먹는 장면의 배치는, 말없이도 ‘외로움’과 ‘순간의 환희’ 사이의 간극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또한 자연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미국 서부의 사막, 숲, 들판, 협곡은 단지 배경이 아닌, 인물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풍경은 영화의 외적 리듬을 형성할 뿐 아니라, 펀이 스스로를 치유하고, 자신과 화해하게 만드는 매개로 작용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인위적인 감동이 아닌, ‘함께 살아내는 감정’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자극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쉼표’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쉼표 속에는 자본주의가 빼앗아간 삶의 존엄, 공동체의 붕괴, 그리고 그 와중에도 살아남는 개인의 존엄과 저항이 숨어 있습니다. 영화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더 큰 목소리를 냅니다.

 

길 위에서 다시 만나는 삶의 본질

‘노매드랜드’는 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어떻게 삶을 견디고, 살아내며, 사랑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특정한 계층의 고통을 보여주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감정—상실, 고립, 자립,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펀은 영화 내내 ‘안정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 앞에서도, 끝내 길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누군가의 집에 머무는 것도, 다시 사회 시스템 안으로 돌아가는 것도 택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녀가 더 이상 누군가의 틀 안에서 존재할 수 없는 상태임을 의미하며, 동시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펀의 선택은 개인의 고집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존재 방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정규직, 부동산, 가족이라는 전통적 삶의 틀이 더 이상 모든 이에게 작동하지 않는 지금, 펀은 그것을 거부하며 ‘다른 방식의 삶’을 몸소 보여줍니다. 또한 영화는 ‘공동체의 부재’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안에서 여전히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줍니다. 노매드 커뮤니티의 사람들은 각자의 트라우마와 이유로 도로 위에 있지만, 그 안에서도 서로를 위로하고, 도와주며, 작은 기쁨을 나눕니다. 그것은 단지 살아남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균열을 보여주면서도,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의미를 찾고, 관계를 맺고, 삶을 지속하려는 인간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관객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결국 ‘노매드랜드’는 떠도는 삶에 대한 찬가이자, 정착하지 않음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헌사입니다. 그것은 길 위에서 만난 외로움과 자유, 상실과 존엄,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안고도 계속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가장 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길 위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