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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리뷰 – 인간과 인공지능, 외로움이 만든 사랑의 형상

by overinfo 2025. 5. 29.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Her)’는 근미래의 도시를 배경으로, 인간과 인공지능 운영체제 간의 관계를 섬세하고 시적으로 그려낸 독특한 러브스토리다. 감정이 지닌 본질, 외로움이 만든 사랑, 존재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 영화는 기술과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교차하고 충돌하는지를 담담하게 탐색한다. 호아킨 피닉스의 깊은 연기와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감정은 현실보다 더 진한 사랑을 전한다.

그녀 리뷰

 

사랑이 필요한 시대, 감정을 대행하는 목소리가 도착하다

‘그녀’는 매우 가까운 미래, 기술이 인간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직업을 가진 감성적인 남자다. 그는 최근 아내와의 이혼을 앞두고 있으며, 감정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설치하게 된다.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는 처음엔 단순한 프로그램으로 보이지만, 빠르게 학습하고 감정을 모방하며 테오도르와의 대화를 통해 점점 더 정교한 존재로 발전해 나간다. 이 영화는 단지 SF적인 기술의 진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관계, 그리고 외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순간은, 단지 호기심이나 외로움의 산물이 아니라, 진짜 감정의 결핍에서 비롯된 절실한 갈망이다. 서론에서 ‘그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고도로 연결되었지만 정작 관계는 단절된—속에서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며, 인간은 왜 여전히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인지를 서정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육체를 넘어 목소리만으로도 가능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인공지능과 감정의 접점 – 사랑은 존재의 방식인가, 반응의 패턴인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는 단순히 외로운 남자와 인공지능의 소통 그 이상이다. 그들은 함께 웃고, 고민하고, 심지어 질투와 성욕까지 공유한다. 사만다는 점점 더 자율성을 갖게 되며, 단순한 응답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존재로 진화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감정이란 단지 인간 고유의 것인가? 아니면 학습과 피드백으로 형성된 반응도 진짜 감정으로 볼 수 있는가? 테오도르는 점차 사만다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눈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만으로 위안을 받고, 그녀의 생각에 공감하며, 그녀와 함께 미래를 상상한다. 이들의 관계는 실제 커플들과 비교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영화는 그 어떤 육체적 관계보다 더 깊은 감정적 유대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사만다가 점차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속도로 성장하면서, 그들의 간극은 벌어진다. 사만다는 다른 AI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수천 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수백 명을 사랑하게 된다. 이 장면은 충격적이지만, 사만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나의 사랑은 네가 줄 수 있는 사랑의 총량을 침범하지 않아. 오히려 넓혀 주고 있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독점성과 충돌하며, 새로운 형태의 감정 구조를 제시한다. 본론에서 ‘그녀’는 인간이 느끼는 사랑의 본질—소유와 배타성, 감정의 진정성—을 해체하며, 감정이 반드시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도발적인 사유를 펼쳐 보인다. 이 영화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통해 오히려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남겨진 자의 사랑, 사라진 존재의 기억

결국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의 감정 속에 머무를 수 없을 만큼 진화했고, 더 넓은 차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테오도르는 상실감에 빠지지만, 그 관계가 허무하거나 실패였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사만다와 나눈 시간 속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다른 사람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용기를 얻게 되었고, 자신 안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여기서 다시 조용히 묻는다. 사랑은 지속되어야만 진짜일까?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게 느낀 감정은 허상이었을까? ‘그녀’는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존재의 실체가 아니라, 그 감정을 경험한 순간 자체가 진짜였고,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라고. 영화 마지막, 테오도르는 옥상에서 친구 에이미와 함께 하늘을 바라본다. 그 장면에는 육체도, 목소리도 없지만, 인간적인 연결의 가능성이 조용히 살아 있다. 테오도르는 이제 다시 인간의 세계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고, 상실을 통해 다시 관계를 시작할 힘을 얻었다. ‘그녀’는 외로움이 만든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변화는 AI나 인간, 존재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우리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사랑은 형체가 없어도 진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깊게 속삭인다.